알라딘 중고서점을 어슬렁거리다가 익숙한 작가의 이름을 보고 충동적으로 고른 책이었다. 예전에 언니가 이 작가의 다른 책인 '불안한 동화'를 보여줬었고 그때 처음 알았다. 이 작가의 책은 주로 미스테리, SF 장르물이라고 알고있어서 이 책 역시 그런 장르일거라 생각하고 아무런 정보없이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아무리 읽어도 미스테리는 나타나질 않았다. 미스테리가 뭐였는지 굳이 고르자면 읽어갈수록 베일에 쌓여있던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 갈등이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과 보행제에 전교생이 모르는 인물이 나타났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계속 읽어내려가다가 중간쯤에서야 깨달았다. 아! 이건 청춘소설이었구나. 전혀 생각지도 않았고 기대없이 읽었기에 전개가 참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나서는 정말 읽길 잘했다는 기쁨을 느꼈다. 이 책에서 "나"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25살 이후 지금까지 나를 움직이게 한 가장 중요한 지표가 그곳에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책속에 있는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은 지금이라고.
지금을 미래를 위해서만 쓸수는 없다고.

 

그 글을 보자 바로 얼마전 떠나간 사랑이 생각났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돌아오지 않을 순간이기에 내가 할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줄 수 있는 것들을 주려고 노력했다. 끝에서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나가버린 시간에 아쉬워하는 건 한번으로 족했고 지금 그러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헤어진 그 사람이 떠오름을 느끼며 계속 책을 읽어나갔다. 마음의 방어기재가 강한 도오루의 모습이 점점 그 사람과 겹쳐져갔다. 또 화풀이하지 못하는 둔한 다카코와 내 모습이 닮았음을 느꼈다. 등장인물들의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들이 그렇게 나의 현실과도 많이 닮아있었다. 그들이 보행제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읽고있는 나 역시 스스로와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아마 고등학교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별 의미없이 잊혀졌을 것이다. 내 현재의 감성에 아주 적절한 책이 놀라운 타이밍으로 등장해준 것만 같았다. 바로 지금이기에 계속 갈등하고 생각하면서 걷는 감성이 실감나게 다가올 수 있었다. 나도 몇달 전 내 마음속 갈등을 어쩌지 못해 미친듯이 걸었던 때가 있었으므로. 그리고 알 수 있었다. 이 작가는 틀림없이 이 보행제를 경험했다는 것을. 그렇지 않고서야 그 신음과 고통을 그렇게 사실적으로 표현해 낼 수 없다.

 

책을 모두 다 읽었을 때는 그들이 조금 부러웠다. 보통의 걷기와는 다른 아주 특별한 함께 걷기를 하면서 숨어있던 갈등을 풀어낼 기회가 내게는 없었다. 하지만 이내 괜찮아졌다. 그런 기회가 분명 올거라는 이상하고도 막연한 믿음이 생겨났다. 그들처럼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날이 찾아오리라고 말이다.

 

굳이 잡음을 차단하고 얼른 계단을 다 올라가고 싶은 마음은 아프리만큼 알지만 말이야. 물론 너의 그런 점, 나는 존경하기도 해. 하지만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 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 때가 있는거야. 네게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건 지금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너, 언젠가 분명히 들어두었더라면 좋았을걸 하고 후회하는 날이 올거라 생각해

시노부가 도오루에게 (P.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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